도서명 : [조선왕실 이혼의 사회사 - 쫓아낸 자와 쫓겨난 여성들의 민낯](한희숙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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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2404-19-6 (93900)
정가 : 25,000원
저자 : 한희숙
출판사명 : 솔과학 출판사
크기 : 신국판
형태 : 양장
페이지수 : 394페이지
출간일 : 2022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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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학문의 길을 ‘작해지공(酌海之功 - 바닷물을 술잔으로 퍼 담는 노력)’이라고 했다. 30여 년 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시대 군도활동,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 원초적인 농민저항을 비롯해 주로 사회사, 인물사, 제도사 등을 연구했다!
이 책은,
조선시대 당연하게 여겨왔던 가부장적 권력구조와 여성억압,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욕망을 왕실 이혼 사례를 통해 꼼꼼하게 파헤친 역작이다. 아울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성차별적 문제들을 되짚어보게 하는 대중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흥미로운 역사서이다.
이혼과 권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지만 그 상관성은 사실(史實)이고 현실이다. 특히 조선조 가부장적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국왕과 왕실에서의 이혼은 권력 구조와 운영이 낳은 슬픈 이야기이다. 저자는 다소 자극적인 주제를 매우 꼼꼼한 실증적인 방법으로 담담하게 풀어냈다. 이 책은 한 시대의 역사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는 여성에게 덧씌워진 굴레를 조망하려는 의미있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조선 왕실의 혼인 관계 해소를 단순히 ‘쫓겨남’이 아니라 ‘이혼’이라는 정제된 개념으로 풀어낸 역사책이다. 신선한 시각과 철저한 고증이 돋보인다.
유교적 가치규범을 솔선해보여야 했던 왕실구성원들이 혼인과 이혼을 통해 권력과 사랑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드러냈고, 이것이 조선정치사에 어떠한 반향을 일으켰는지를 알기 쉽게 풀어낸 흥미로운 역사서이다. 왕업을 일으키고 덕치를 행한 성군들조차도 부인과 며느리에게 가혹했던 왕실 이혼의 민낯을 당대 정치 현실 속에서 입체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이혼제도에 담긴 가부장제의 구조적 모순을 깊이 있게 지적함으로써 향후 여성사 연구에 중요한 이정표로 기억될 책이라 생각한다.
1. 서문 및 출판사 서평
이혼은 결혼 관계를 소멸시키는 행위이다. 이혼은 결혼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이혼은 매우 국가적인 일이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왕실 이혼이 빚어낸 상황들은 매우 역사적인 것이었다. …
조선시대에는 혼인의 위협적인 파탄인 이혼은 사회와 가정의 안정을 해치는 것으로 이해되어 매우 금지되었다. 특히 ‘수신’과 ‘제가’를 중요시하는 유교문화 속에서 이혼은 이것을 잘 수행하지 못한 결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수치는 물론 가문의 큰 수치로 여겨졌다. …
그러나 이혼은 결혼 못지않게 그 사회를 진단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결혼과 이혼은 부부간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며, 매우 사회적인 문제이자 공동체적인 문제로 작동해 왔다. 특히 조선 왕실의 이혼은 매우 국가적인 일이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글을 쓰면서 왕이나 왕자들의 일방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인 처사에 엄청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처신을 잘못해 쫓겨나는 젊은 왕비나 어린 세자빈들의 행동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정치적 이유와 남편의 변심 때문에 죄없이 쫓겨나는 왕비와 어린 대군 부인들의 처지를 상상하며 여성들에게 씌워진 굴레에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폐비, 폐세자빈, 대군부인과 공주의 이혼 사건은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고, 또한 권력과 혼인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아울러 현재의 가정과 사회 속에 구조적으로 깊이 내재해 있는 가부장적 체제와 문화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공고화되어 왔었는지도 아울러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본 책의 구성과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서장에서는 조선시대 이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조선시대의 이혼법과 이혼조건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왕실 가족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인적 구성에 대해 간략히 제시하였다. 먼저 왕과 왕비, 세자를 비롯한 왕자(대군·군), 왕녀(공주·옹주)들을 정리하고 이들 중 이혼한 사례가 몇 명인지 살펴보았다.
1장에서는 조선 왕실의 첫 이혼사례가 된 태조의 세자 방석과 현빈 유씨의 이혼에 대해 살펴보았다. 갓 혼인한 현빈 유씨는 환관 이만과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태조에게 내쫓김을 당했다. 태조는 세자의 이혼을 집안의 일로 여기고 숨기고 싶어 했다.
2장에서는 세종대에 있었던 세자 향(후의 문종)과 현빈 김씨, 순빈 봉씨와의 이혼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이혼과 재혼, 8남인 영응대군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 살펴보았다. 세종은 두 명의 세자빈과 두 명의 며느리를 내쫓았다. 즉 3아들의 이혼과 재혼을 주도했다. 세종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세자빈을 얻고자 했으며, 자식을 많이 낳을 건강한 며느리를 얻고자 했다. 세종은 누구보다 엄혹한 시아버지였다.
3장에서는 단종대 있었던 영응대군의 두 번째 이혼과 전처와의 재결합에 대해 살펴보았다. 영응대군은 아버지 세종이 죽자 곧바로 전처를 찾아갔고, 두 딸을 낳았다. 그리고 세종이 주도해서 재혼한 부인을 마음대로 내쫓고 다시 전처와 재결합하는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죄없는 두 번째 부인을 쫓아내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것이다.
4장에서는 성종대에 있었던 성종의 이혼과 재혼,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그리고 예종의 외아들 제안대군의 이혼과 재혼, 두 번째 이혼과 전처와의 재결합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성종은 조선왕조 성립 후 첫 번째로 부인을 쫓아내고, 왕권 강화를 위해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 왕이었다. 이 사건이 조선 왕실 여성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이후 부덕(婦德)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왕비는 없었으며,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인현왕후를 쫓아낼 때와 희빈 장씨를 사사할 때, 또 ‘후궁으로 왕비를 삼지 말라’고 내린 명령도 폐비윤씨사건을 그 전례로 삼은 것이었다.
5장에서는 중종대에 있었던 중종의 이혼과 재혼, 연산군의 딸 휘순(신)공주의 이혼과 재결합에 대해 살펴보았다. 중종은 조선 최초로 신하들이 일으킨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옹립된 왕으로 반정공신들의 압력에 의해 부인 신씨를 폐출하였다. 신씨의 아버지가 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중종은 조강지처 신씨를 보호할 수 없었고, 이후 장경왕후의 죽음으로 신씨를 복위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복위시키지 못하고 문정왕후와 또 재혼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신씨와 다시는 함께 할 수 없었다.
6장에서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이혼과 재결합에 대해 살펴보았다.
숙종은 첫 부인 인경왕후 김씨와 사별한 뒤 인현왕후 민씨를 계비로 맞아들였으나 총애하는 후궁 장씨가 아들을 낳자 인현왕후를 투기죄로 몰아 쫓아내고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해진 이혼의 특징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2. 목차
| 책머리에 | 4
서장 조선시대 이혼조건과 왕실 가족
1. 조선시대의 이혼조건, 칠거지악(七去之惡) _21
- 이혼을 금지한 나라, 조선왕조 _21
- 이혼을 가리키는 용어와 이혼 문서 _25
- 조선에서 사용한 『대명률』에 규정된 이혼 형태 _29
- 처를 내쫓을 수 있는 악조건, 칠거지악 _37
- 이혼 방지책, 삼불거(三不去) _40
2. 조선 왕실 가족의 이혼실태 _42
- 왕과 왕비의 이혼실태 _42
- 세자와 세자빈의 이혼실태 _46
- 왕자와 부인들의 이혼실태 _49
- 왕녀와 부마의 이혼실태 _53
1장 태조대: 조선 왕실 최초의 이혼, 세자 방석의 이혼
- 음행으로 쫓겨난 현빈 유씨 _61
- 새 세자빈 현빈 심씨의 책봉 _67
2장 세종대: 며느리를 4명이나 쫓아낸 세종
1. 세자 향(문종)과 휘빈 김씨의 이혼 _75
-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의 간택 _75
- 압승술(壓勝術)을 사용하다 폐출된 휘빈 김씨 _81
2. 세자 향(문종)과 순빈 봉씨의 이혼 _90
- 두 번째 세자빈 순빈 봉씨의 책봉 _90
- 투기와 동성애 사건으로 쫓겨난 순빈 봉씨 _94
- 새 세자빈 간택 무산과 소실 권씨의 세자빈 승격 _105
3. 임영대군의 이혼과 재혼 _110
- 병으로 쫓겨난 첫 부인 의령남씨 _110
- 새 부인 전주최씨와의 재혼 _118
4. 영응대군의 이혼과 재혼 _123
- 병을 이유로 쫓겨난 첫 부인 여산송씨 _123
- 해주정씨와의 재혼 _128
3장 단종대: 영응대군의 두 번째 이혼과 전처와의 재결합
- 세종 사후 영응대군의 변심으로 쫓겨난 해주정씨 _133
- 전처 여산송씨와의 재결합 _139
4장 성종대: 성종·제안대군의 이혼
1. 성종과 폐비 윤씨의 이혼과 사사(賜死) _147
- 윤씨의 후궁 간택과 입궁 _147
- 후궁 윤씨의 못마땅한 왕비 승격 _155
- 첫째 출산 후 1차 폐비 논의와 자수궁 별거 _159
- 둘째 출산 후 2차 폐비 논의와 폐출 _171
- 왕비 바꾸기, 후궁 파평윤씨의 왕비 책봉 _183
- 폐비 윤씨 처우를 둘러싼 성종과 대간의 극한 갈등 _187
- 왕권 강화를 위한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_192
2. 제안대군의 이혼과 재혼, 전처와의 재결합 _200
- 왕위 계승권을 가졌던 제안대군 _200
- 병을 이유로 쫓겨난 첫 부인 상산김씨 _203
- 제안대군의 변심으로 쫓겨난 후처 순천박씨 _208
- 제안대군의 삼혼 거부 소동, 전처 상산김씨와의 재결합 _221
5장 중종대: 중종·휘순공주의 이혼
1.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이혼과 추복(追復) _229
- 성종의 2자 진성대군(중종)과 신씨의 혼인 _229
-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 쫓겨나는 신씨 _236
- 폐비 아닌 폐비, 신씨의 처지 _248
-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죽음, 신씨 복위 논의와 좌절 _253
- 중종의 마음속 빚, 조강지처 신씨 _264
- 쫓겨난 지 233년 만에 이루어진 신씨의 추복 _268
2.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의 이혼과 재결합 _273
- 부마 구문경과의 혼인 _273
- 딸 혼인을 위한 연산군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 _284
- 연산군의 폐위로 쫓겨난 휘순공주 _291
- 딸은 출가외인, 신하들의 요구로 재결합한 휘순공주 _299
6장 숙종대: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이혼과 재결합
-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의 혼인 _307
- 평생의 악연,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한 장옥정 _316
- 장씨의 원자 출산과 흔들리는 왕비 자리 _324
- 서자를 적자로 만들고 싶은 숙종, 쫓겨나는 인현왕후 _328
- 왕비가 된 장씨, 적자의 정통성을 확보한 세자 _337
- 복위된 인현왕후, 다시 후궁이 된 희빈 장씨 _340
- 인현왕후의 죽음과 희빈 장씨의 사사, 인원왕후의 책봉 _352
맺는말 조선 왕실 이혼의 특징
- 조선 초기에 집중된 왕실 이혼, 이유는 칠거지악 _365
- 투기와 정치적 이유로 폐비·폐출된 왕비들 _370
- 투기와 음란함을 이유로 폐출된 세자빈들 _375
- 병과 남편의 변심 때문에 쫓겨난 대군 부인들 _378
- 시집에서 쫓아낼 수 없는 존재, 공주의 재결합 _382
- 목소리를 거세당한 젊은 왕실 여성들 _384
| 참고문헌 | 388
3. 본문 중에서
이혼을 금지한 나라, 조선왕조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의 건국 세력들은 고려왕조의 멸망 요인의 하나로 여성들의 풍기문란을 들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유교적 여성상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정책과 이데올로기에 정착하지 못한 여성들은 부덕(婦德)을 상실한 여성으로 취급당하였다. 유독 조선 초기에 여성정책에 관련된 기록이 많은 것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왕조가 건국되면서 새로운 여성정책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p.21 중에서)
새 세자빈 간택 무산과 소실 권씨의 세자빈 승격
세종은 맏며느리인 세자빈의 책봉과 폐출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세자빈은 왕실을 대표하는 차기 국모였기 때문이다. 두 명의 맏며느리를 부덕 상실을 이유로 내쫓은 세종은 봉씨를 폐출시킨 지 열흘 정도 지난 11월 7일(무술)에 세자빈 폐출의 이유를 대신들에게 알리고 다시 새로운 세자빈을 맞이하고자 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자빈을 간택하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서울과 지방의 명문가 딸 몇 사람을 선택하여 길흉을 점치고, 덕용(德容)을 점치게 했지만,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세종 18년 12월 28일 기축) 딸 가진 양반들도 자신의 딸을 세자빈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세자빈을 간택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금혼령을 내리기에는 주저함이 있었는지 다시 금혼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p.105 중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폐비 거처와 처우 문제를 둘러싸고 언관들과의 극한 대립 속에서 막중한 심리적인 부담을 안게 된 성종은 결국 윤씨를 죽임으로써 논의를 끝내고자 했다. 성종이 폐비를 죽일 뜻을 굳힌 데에는 시독관 권경우와 대사헌 채수 등 대간들의 끈질긴 주장이 큰 영향을 미쳤다.
윤씨의 죽임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는 성종이 자신을 견제하고자 하는 대간들에게 던진 한판 승부수였다. 대간의 주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성종 또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폐비 윤씨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되었다.
(p.192 중에서)
부마 구문경과의 혼인
휘순공주(?~?)는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는 정확하지 않다. 그 이유는 폐위된 왕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성종의 묘지문에 “금상 전하(연산군)가 우의정 신승선의 딸을 맞이하여 비로 삼아서 2녀를 탄생했는데, 모두 어리다.”(『성종실록』 권297, 성종대왕 묘지문〔誌文〕) 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성종이 죽기 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은 12살인 성종 19년(1488)에 신승선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성종이 죽은 25년에 이미 둘째 딸이 어리다고 한 것으로 보아 휘순공주는 대략 성종 21년(1490)~23년(1492)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휘순공주의 이름은 수억(壽億)이며, 혼인한 이후 휘신공주로 봉호를 바꿨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휘순공주라는 표현이 조금 더 많이 나온다.
(pp.273~274 중에서)
『승정원일기』에는 숙종 26년 3월 26일 인현왕후의 발병부터 이듬해 8월 1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1년 5개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그녀의 병세와 처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투병 생활이 길고 힘들었음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희빈 장씨를 견제하는 노론들에게 인현왕후의 병세가 매우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인현왕후의 병세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질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과거와 지금이 많이 다르다. 그러나 몸에서 일어나는 병증은 인현왕후 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 당시 의관이 진단한 인현왕후의 병명은 통풍이었다.
중전께서 며칠 전부터 좌우 양쪽의 다리에 통증이 나타나더니 어제 저녁 이후로 통증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 중전의 다리 통증은 오른쪽이 특히 심하며 환도혈(環跳穴: 골반외측에 자리한 혈자리) 위 허리 쪽 척추 부근이 현저하게 부어올라 통증을 참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밤이 되면 그 증세가 훨씬 심해진다 합니다. 신들이 여러 어의와 상의한 결과, 습열(濕熱: 습과 열이 결합된 나쁜 기운. 또는 그 기운으로 생기는 병)이 아래로 흘러 경락이 막혀 생긴 통풍증상이라고 모두 말합니다…. 이러한 증상은 대부분 낮에는 통증이 약했다가 밤이 되면 심해집니다.(『승정원일기』 숙종 26년 3월 26일 기미)
(pp.353~354 중에서)
유교적 가부장제가 강하게 작동하던 조선시대에 여성은 침묵을 강요당하며 살았다. 지엄하기 끝이 없는 왕실에서 왕과의 관계에선 더욱 그러했다. 쫓겨나는 여성들도 분명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 변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가 대변하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격한 가부장적인 왕실 가족 질서 속에서 가장 약자로 존재했던 여성은 왕실의 어린 며느리들이었고,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질 때까지는 여느 양반 며느리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법도와 의리에 따라 행동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칠거지악이라는 악법에 걸려 내쫓김을 당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함부로 휘둘러지는 것을 국가에서 방지했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왕과 왕실에는 그다지 적용되지 않았다. 정해진 규범대로 행동하고 순종해야 할 뿐, 자아를 드러낼 수 없었다. 여성에게 이혼은 더없이 위협적이고 삶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조선 왕실의 안녕과 유지는 왕과 세자·대군 등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권력구조 속에서 목소리를 거세당한 채 참고 견디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수행에 애썼던 왕실 여성들의 극한 인내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아직도 이러한 일방적이고 모순된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권력구조가 곳곳에서 작동되고, 요구되고 있는 건 아닌지 되살펴 볼 일이다.
(pp.386~387 중에서)
4. 저자 소개
저자 한희숙
경상북도 문경군(시) 작은 마을에서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별명은 꼭지였고, 집안 어른들은 나를 보면 ‘그거 하나만 달고 나왔더라면…’ 하고 안타까워했다. 항상 상고머리에 바지를 입고 자랐다. 아직 여성이 여행하는 것이 매우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고적답사의 매력에 빠져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면서 상경했다. 평생 직업을 고민하며 교사자격증을 취득했으나, 서울에 더 머물고 싶은 욕망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시절과 대학원 시절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였고, 정치, 사회, 여성, 모든 분야에 걸쳐 변혁기였다. 조선시대 사회사에 관심을 가져 신분 문제를 주제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30여 년 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시대 군도활동,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 원초적인 농민저항을 비롯해 주로 사회사, 인물사, 제도사 등을 연구했다. 여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여성사 연구는 더욱 숙명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주 전공시대가 조선시대인 만큼 인수대비 등 조선시대 여성을 주로 연구했다. 앞으로는 근현대 여성사도 살펴볼 예정이다.
학문의 길은 ‘작해지공(酌海之功 - 바닷물을 술잔으로 퍼 담는 노력)’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정년을 몇 년 앞 둔 지금, 부족함과 아쉬움이 너무 많다. ‘일모도원(日暮途遠 -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이라고 한 옛말이 어느 때보다 실감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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